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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남자 한얼

[한얼] 책읽기 - 만화 박정희 - 그는 독재자일까?


By 책 읽어주는 남자 한얼

만화 박정희 1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백무현 (시대의창,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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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이  름 : 만화 박정희

- 글 지은이 : 백무현

- 그림 그린이 : 박순찬

- 펴  낸  곳 : 시대의창

- 기       획 : 민족문제연구소, 뉴스툰

 

전두환의 호를 딴 일해공원을 짓는다고 난리를 치는 상황에서 만화 전두환이 나왔다.

 

서점에서 먼저 보게 되었다.

 

내용은 과연 무엇일까? 궁금했지만 비닐로 내용을 볼 수 없게 포장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거 전두환 띄우기 위한 내용 아니야?

 

그래서 궁금하게 만들려고 이렇게 포장 되어 있는건가?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 였다.

 

몇 일 뒤에 지면을 통해 광주사태를 일으킨 전두환에 대한 내용이라는걸 알게됐다.

 

지인이 얼마후 그 책을 샀고 난 읽고 빌려주세요라고 예약을 하였다.

 

하지만 그 지인은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었다며 대신 만화 박정희라는 책을 빌려주었다.

 

우리는 박정희에 대해 어렴풋하게 알고 있다.

 

40대 이후 세대라면 철들 무렵부터 박정희(대통령 재임 1963년-1979년)를 통한

 

계엄령, 유신, 반공교육, 장발, 미니스커트 단속, 예비군 훈련, 노동자 탄압, 베트남 참전, 새마을운동,

 

수출 10억달러 돌파, 경부고속도로 개통, 사사오입, 지역감정 유발, 한일 청구권 협상 타결, 인혁당 사건,

 

국민교육헌장 낭독 등 여러가지일을 겪었을 것이다.

 

30-40 세대라면 어렸을적 국부가 시해당했다는 언론의 뉴스를 통해 접했을 것이고

 

그 이전 세대들이라면 경제발전을 이룬 대통령,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로 가지게 된 자주 대통령,

 

독재자 등 어렴풋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박정희는 독재자일까? 아닐까?

 

그 판단은 여러분 스스로 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일제 정권하의 관료, 형사, 지식인, 교수 등등이 그대로 그 지위와 권력을 유지하고

 

친일파들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취득한 땅을 내 땅 돌리도 하고 청구하고

 

독재자라고 판단되는 대통령의 딸이 한 나라의 당의 총재를 하고 대통령 출마하겠다는 세상에

 

그런 세상에 그런 나라에 여러분은 살고 있습니다.

 

박정희로 인하여 경제부흥이 일어났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런 경제성장을 이루어내지 못했을까요?

 

국민들이 부지런하고 똑똑했기에 이루어내지는 않았을까요?

 

아직도 우리는 일제시대에 군사정권하에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유화되고 이름이 바뀌어서 여러분 곁에 있을뿐인지도 모릅니다.

 

경제가 성장된다면 독재와 부패가 있어도 상관이 없을까요?

 

노조를 보면서 아직도 빨갱이들 왜 저래 하는 어르신들도 계십니다.

 

노조안에도 부패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상한 사람도 있을 수도 있구요.

 

그렇다고 옳은 얘기를 이 세상에 잘못 되어 있을걸 옳게 고쳐봅시다라고 말할 수 없는걸까요?

 

당신의 자녀가 월 80만원을 받으며 비정규직으로 근무해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해고나 구조조정이 당연시 되어 당신의 아버지가 출근하는척 하고

 

공원에서 차가운 우유와 빵을 먹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대기업이 구멍가게와 택배와 온갖것을 문어발로 확장해서 동네구멍가게까지 망하고

 

기업들은 담합을 해서 밀가루값, 석유값, 과자값까지 자기네 맘대로 하고,

 

정부에서 앞장서서 비정규직을 만들고 외국기업들에 공기업을 팔아먹는 나라.

 

외국기업들마저 한국에 와서는 당연한듯 노동자를 탄압해도 괜찮게 생각하는 나라.

 

신자유주의라 뉴라이트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국민들의 고혈을 빨아 먹으려는 나라.

 

100을 가진 사람과 1을 가진 사람이 동일한 조건으로 싸워봐라라고 하는 나라.

 

국민들의 고혈로 성장한 대기업 하지만 그 대기업은 서민을 죽이고 있습니다.

 

이런 경제부흥을 가져온건 박정희나 대기업이 아니라 열심히 죽어라 일만한 서민 대중들입니다.

 

매일 부동산은 오르지만 서민에 대해서는 대출규제해야 부동산이 안오른다고 하는 나라.

 

국민을 연일 세뇌시키는 자극적 문구의 옐로우 페이퍼 신문들, 천편일률적인 공중파의 뉴스들.

 

경제는 중요하지만 복지는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는 나라.

 

이 나라가 왜 이렇게 흘러오고 계속 이렇게 흘러가는 걸까요?

 

서설이 너무 길었네요. 죄송합니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글을 쓰려고 하는데 또 열이 받아 감정적이 되네요.

 

본격적으로 책 내용으로 들어가 볼까요?

 

만화라면 저질문화 유치한것으로 생각하시는분들도 꽤있지요.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허영만 선생님의 '오! 한강(전 5권)'-개인적으로 허영만 선생님의 최고걸작이라고 생각함-을

 

읽어보시면 대하소설에 들어갈 내용이 겨우 5권 안에 녹아들어가 있습니다.

 

소설이 연극이라면 만화는 뮤지컬 이나 영화정도의 표현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질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리시고 만화 박정희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책을 펼치면 "왜곡된 역사나 날조된 신화보다 더 서글픈 것은 세뇌당한 영혼이다"라는 문구가 나옵니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일제의 만주 신경군관학교 2기 졸업 수석을 차지한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

 

대구사범 학교를 졸업하고 일제당시 꽤 괜찮은 직업인 보통학교 교사가 되었지만

 

그는 혈서를 바치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갑니다.

 

만주 군관학교 출신은 박정희 통치하에서 총리, 국회의장, 감사원장, 건설장관 등 다양한 국가요직을 차지합니다.

 

또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이 나중에 우리나라의 군대 참모총장 등 에서 요직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박정희는 다시 일본육사를 들어가 3등으로 졸업하고 만주에서 항일세력을 토벌합니다.

 

만주군관학교 출신은 일본 패망후 광복군에 편입이 됩니다.

 

박정희는 해방후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2기로 입교합니다.

 

46년 대구민중항쟁에서 박정희가 좋아하던 친형 박상희가 경찰의 총에 숨집니다.

 

그로인해 남로당과 박정희는 교류가 있게 되고 남로당 가입혐의로 박정희 리스트로

 

형과 친분이 있었던 사람들의 목숨을 팔아서 자신은 살아남지만 군인의 신분은 박탈당합니다.

 

6.25 전쟁에서 박정희는 다시 전투정보 과장으로 복직을 합니다.

 

박정희는 대령이 되고 1952년부터 또다른 독재자 이승만을 제거하는 계획에 끼어듭니다.

 

하지만 1960.4.19일 419혁명으로 여러차례 진행되었던 계획은 결국 수포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결국 1961.5.16일 516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강탈합니다.

 

혁명내각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장관 및 정부의 장은 군인출신이 맡습니다.

 

1961.5.17일 전두환은 육사생도들과 쿠데타 지지 시위를 하고 출셋길로 달리며

 

훗날 전두환 또한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쿠데타 이후 민심용 개혁조치들은 잇달아 나왔습니다.

 

이로 정치깡패 4000명 검거, 축첩 공무원 1천 수백명 파면, 병역 기피자 직장 추방,

 

용공분자 2000명 검거, 부패 언론기관 통폐합.

 

하지만 반공 논리로 혁신계 인사들을 처단하고 부정축재자들은

 

경제 건설에 활용한다는 명목으로 거의 사면하였습니다.

 

박정희는 자신의 좌익연루 전력으로 미국으로부터 받던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61년 2월 창간하여 폐간될 때까지 진보적인 논조를 보여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에 버금가던

 

민족일보를 조총련계 돈으로 만들었다는 혐의를 씌어 강제 폐간하고 민족일보사 사장 조용수씨를 사형시킵니다.

 

이 재판의 심판관의 한사람은 2002년 대선에 출마한 한나라당 전 총재 이회창씨입니다.

 

1991년. 조용수에게 자금을 댔다는 '간첩'이영근이 사망하자 정부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합니다.

 

1961.6.10일 현재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중앙정보부(중정)를 창설합니다.

 

중정은 외교에서부터 정치공작, 선거공작, 이권배분, 정치자금 징수, 미행, 도청, 고문, 납치, 테러,

 

공작, 조작, 문학예술의 사상평가, 심지어 여색관리, 밀수, 암살까지 전지전능한 권력의 중추였습니다.

 

중정은 박정희의 지시를 받아 김종필이 만들었으며 김종필은 중정의 초대 부장을 지냈습니다.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회고록에 의하면 '직업 수사관들의 전직은 사찰계 형사, 방첩부대문관, 헌병하사관,

 

 심지어 일제치하의 조선인 헌병, 고등계 형사와 밀정 등 형형색색이었다'

 

- 이들로 인하여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한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을런지 -

 

그리고 현재까지도 많은 문제가 되는 막걸면 걸려버리는 막걸리 반공법을 만들었습니다.

 

중정은 유흥장 폐쇄조치로 미군들이 일본으로 휴가를 가자 워커힐을 건설키로 합니다.

 

정부출자금 5억 3600만환으로 공사를 진행했으며 임병주 중정 1과장이 막대한 공사자금을 횡령합니다.

 

더욱이 그들은 교통부장관과 군의 공병감에게 압력을 넣어 군장비, 군인, 복역수 등 연 인원2만여 명을

 

무상으로 노역에 동원합니다.

 

공화당 사전조직에 열을 올리던 김종필 라인이 자금염출을 위해 재일교포 재벌 박노정과 합작

 

새나라 자동차를 만들어 일본에서 소형 자동차 부품을 조립생산키로 하고 무관세 수입등 특허를 받아 공장을 설립합니다.

 

하지만 박노정은 중정의 체포를 피해 원금도 건지지 못하고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도망치게 됩니다.

 

또 중정은 그당시 법으로 금지된 빠찡꼬 밀수를 눈감아주고 일본 현지 시세보다 비싼값에 팔게 하고 커미션을 챙깁니다.

 

62년 1월 일흥증권과 통일증권을 설립 농협이 가진 한전주 12만 8000주 싸게 불하받고 주가조작으로

 

40억환(약 3,000만 달러) - 60억환(약 4,500만 달러), 현재 가치로 약 3,000 - 4,000억원의 돈을 챙겨 중정으로 가져갑니다.

 

2개월 뒤 휴장 뒤 다시열린 증시에서 주식은 폐지로 변하고 일반투자자들은 패가망신합니다.

 

군정 말기는 군사혁명 정부의 부패는 더 심하였습니다. 셋방살던 영관급 장교는 국영 기업체에 취직 몇 달 사이에

 

으리으리한 집을 짓고 5.16 일년만에 거액을 챙긴 어떤 군인은 군인을 그만두고 사채놀이를 하고

 

구 한국 황실재산을 먹어치우고 공원용지를 멋대로 불하하여 사리를 채웠습니다.

 

박정희는 5.16 이전에 혁명자금을 주지않았다고 부일장학회, 부산일보, 문화방송 등 김지태씨의 개인 재산을

 

몰수하여 5.16 장학회를 만들고 후에 전두환 집권시 박정희 '정'과 육영수 '수'를 합쳐 정수장학회로 이름을 바꿉니다.

 

정수장학회는 김지태씨가 소유했던 부산일보 주식 100퍼센트, 문화방송 주식 30퍼센트, 경향신문땅 723편 등 재산을 바탕으로

 

언론장악과 함께 엄청난 재력단체로 성장했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이사장이었으나 비판 여론이 일자

 

2005년 2월 이사장직을 사퇴합니다.

 

박정희는 8.12 민정 이양 하기로 하고 정치활동은 63년 1월 1일 부터 할 수 있도록 해놓고 자신들은

 

62년 초 중정 행정차장 이영근, 조직부장 강성원, 관리부장 정지원 등으로 비밀리에 사전 정치활동을 합니다.

 

62년 12월 27일 민정참여 언명, 63년 2월 18일 민정 불참 선언, 2월 27일 3군  참모총장과 야당 지도자들 앞에서

 

민정 불참 선서, 3월 7일 원주 발언, 군정 연장 시사. 3월 16일 군정 연장 성명, 연일 군정 연장 반대 시위.

 

4월 8일 원산 환원 조치 .

 

하지만 63년 8월 30일 박정희 대장은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합시다"는 연설로

 

전역식을 거행하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합니다.

 

대통령 선거에서 밀가루도 뿌리고 그동안 넉넉히 모아둔 정치자금을 닥치는 대로 뿌립니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비리를 저지른 부정선거였지만 윤보선과 15만표 차이로 대통령이 됩니다.

 

62년 김종필을 시켜 식민지 35년을 배상하는 청구권 협상을 타결시킵니다.

 

청구권이라는 용어도 사용하지 못하고 '독립축하금'이란 이름으로 유무상 차관까지 합쳐 고작 8억달러에

 

35년 식민통치에 따른 모든 배상문제를 마무리 합니다.

 

그 자금중 강제 징용자 등 피해자에게 지급할 돈 가운데 10프로만 지급하고 거의 가로채 포항제철과

 

고속도록 건설 등 경제 개발에 이용합니다. 피묻은 돈을 횡령하여 개발에 쏟아 부은 것이다.

 

이 치욕적 협상 내용은 2년 동안 비밀에 부쳐지다가 64년 들어 내막이 밝혀지자, 이 사실을 안

 

학생들은 격렬한 시위에 나섭니다.

 

더구나 박정희는 청구권 자금 속에 국가는 물론 개인의 청구권까지 포함시켜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에 보상을 요구할 권리마저 박탈해 버렸다. 이 사실은 2004년에야 알려집니다.

 

대일 굴욕 외교 반대 시위는 6.3 항쟁으로 이어집니다.

 

이 매국정권 타도에 나섰던 63세대들은 한나라당 김덕료 위원, 이명박 서울시장, 이재오 의원,

 

열린우리당 김덕규 의원, 이부영 전의장, 정대철 전의원, 한나라당 서청원 전 의원, 박관용 전 국회의장,

 

한나라당 하순봉, 박명환, 현승일, 현경대, 김원길, 민주당 이협, 김경재 전 의원 등

 

그러나 이들 중 대부분은 자신들이 타도하자던 박정희 공화당의 후신인 정당에 몸을 담는 변절도

 

마다하지 않고 63항쟁을 팔아먹는 매명의 정치행보를 보인다.

 

또 박정희는 월남에 파병을 합니다. 9년의 전쟁기간 동안 32만명 파병 10억 달러 외화 획득을 합니다.

 

이 또한 경부고속도로의 재원이 됩니다. 미군 봉급의 3분의 1 수준인 베트남 파병은 5,000여명의

 

무고한 청년의 희생을 가져왔고 제3세계, 심지어 친서방국가의 비난을 받았고 한국의 국제적 지위 약화를 가져왔다.

 

65년 5월 29일 1심을 뒤엎고 조작을 통해 인혁당 사건을 일으켜 무고한 젊은이들을 죽입니다.

 

또 여러가지 간첩조작으로 시인 천상병, 조영수, 정규명, 정하룡, 강빈구, 음악가 윤이상, 어준 등을 고문, 징역, 사형시킵니다.

 

한일협정 등을 비판하던 경향신문 이준구를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시키고 이준구 사장을 사임시키는

 

경향신문 강제 매각 사건을 벌입니다.

 

북한 공비의  청와대 습격 사건후 예비군 창설, 반공정신 강화, 주민등록법과 주민등록증 발급 등 통제를 강화합니다.

 

박정희의 절친한 아우였던 조선일보 사장 방일영 밤의 대통령 '기생들 머리를 가장 많이 얹어 주신 분'께서는

 

정치의 하수인 역할을 하며 이승복 사건을 조작 합니다.

 

69년 9월 정권 유지의 욕심으로 3선개헌을 날치기 통과시킵니다.

 

쌍용양회에서 생산한 시멘트가 팔리지 않자 새마을 운동으로전국적으로 3만 부락에 시멘트 30억원 어치를 뿌립니다.

 

70년 7월 429억원을 투입 경부 고속도로를 개통합니다. 하지만 가장 싼 건설비로 가장 빠른 기간에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는

 

1990년 말까지 보수비는 1527억원으로 건설비의 4배에 가까운 비용이 듭니다.

 

박정희식 개발독재는 정경유착과 성장 제일주의에 따른 빈부격차, 저임금 정책에 따른 노동착취 등

 

온갖 폐혜를 가져옵니다. 재벌 집중 지원에 따른 경제력 집중과 지역불균형 발전으로 지역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71년 대통령 선거 마지막 출마라고 공약을 하고 중정 등을 통한 지역감정 유발 등으로 94만표차로 다시 당선됩니다.

 

7.4 남북공동성명후 통일을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고 자신의 대통령 종신제를 보장하기 위한 '10월 유신'을 일으키고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각 대학은 휴교조치하고, 정치집회는 금지, 언론출판보도방송은 사전검열을 합니다.

 

보안사를 통해 유신을 폭로한 야당의원 최형우를 고문합니다.

 

72년 10월 유신헌법을 통과시켜 간접선거, 대통령 임기 6년으로, 대통령의 국회해산권 유지 국회의 대통령탄핵권 박탈,

 

대통령은 긴급 조치권 등 초헌법적 권한 부여, 3분의 1의 국회의원 및 법관의 임명권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새헌법으로 대통령에 단독 입후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359명 중 기권 2표 외 찬성 99.99 퍼센트 득표로

 

72년 12월에 제 8대 대통령에 당선 됩니다.

 

73년 8월 미국과 일본에서 유신 반대 투쟁을 벌이던 김대중씨를 죽이려 하지만 미국 CIA의 개입으로 무산됩니다.

 

73년 12월  김수환, 함석헌, 천관우, 장준하, 김동길, 계훈제, 백기완, 법정, 김재준, 박두진,

 

이호철, 백낙준, 김찬국, 안명무, 홍남순 등 민주인사 30명이 모여 100만인 서명운동을 개시한지 보름만에

 

서명자가 40만을 넘어서고 정치권, 성직자들이 일어서자 박정희는 긴급조치 1, 2호를 선포하고

 

유신헌번을 비방, 개헌 주장시 영장없이 체포하고 군사재판에 넘겨 징역 15년에 처한다고 합니다.

 

이에 반대하던 학생 교수 기독교 인사 등을 민청학련 사건을 일으켜 사형을 시킵니다.

 

75년 8월 박정희에 반기를 들던 장준하 선생이 등산길에 의문의 실족사를 합니다.

 

육영수 살해 사건 조차도 의문이다. 암살을 시도했던 문세광의 총에 죽은게 아니라는 의문.

 

전 정보부장의 재직중 기밀 폭로를 위해 회고록 출간을 하려했지만 79년 10월 파리여행중 실종됩니다.

 

이 외에 YH 여공 탄압사건, 김영삼 의원직 제명 사건, 부마 민중항쟁 등 여러 사건이 일어나지만

 

손가락이 아퍼 더 못치겠네요.

 

그리고 10월 26일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모델과 가수를 불러놓고 술을 마시던 박정희는

 

중정부장 김재규와 경호실장 차지철의 대립속에서 김재규의 총에 맞아 사망

 

길고 길었던 박정희 정권 18년은 마침내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상 길고 길었던 내용은 마칩니다.